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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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1882년 사쓰마번에서 조선계 일본인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교섭에 참여했고, 특히 포츠담 선언 수용을 지지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며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항복을 모색했다. 그는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옥중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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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시게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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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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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고 시게노리 |
본명 | 박무덕 |
로마자 표기 | Tōgō Shigenori |
출생일 | 1882년 12월 10일 |
출생지 | 히오키, 가고시마, 일본 제국 |
사망일 | 1950년 7월 23일 |
사망지 | 스가모 형무소, 도쿄, 점령하 일본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각료 |
국적 | 일본 |
배우자 | 도고 에지 |
자녀 | 도고 이세 |
경력 | |
직위 | 제58·63대 외무대신 |
내각 | 도조 내각 스즈키 간타로 내각 |
재임 시작 | 1941년 10월 18일 1945년 4월 9일 |
재임 종료 | 1942년 9월 1일 1945년 8월 17일 |
직위 2 | 제4대 대동아대신 |
내각 2 | 스즈키 간타로 내각 |
재임 시작 2 | 1945년 4월 9일 |
재임 종료 2 | 1945년 8월 17일 |
직위 3 | 제21대 척무대신 |
내각 3 | 도조 내각 |
재임 시작 3 | 1941년 10월 18일 |
재임 종료 3 | 1941년 12월 2일 |
직위 4 | 귀족원 의원 |
재임 시작 4 | 1942년 9월 1일 |
재임 종료 4 | 1946년 4월 13일 |
소속 정당 | 무소속 구락부 |
전임자 | 도요다 데이지로 시게미쓰 마모루 |
후임자 | 다니 마사유키 시게미쓰 마모루 |
기타 | |
알려진 것 | 외교관 정치인 각료 |
주요 업적 | 외무대신 대동아대신 척무대신 |
2. 생애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12월 10일 사쓰마번 나에시로가와촌(苗代川村)에서 조선계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났다.[6] 그는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부대에 연행되어 일본에 끌려온 도공 박평의의 후예로,[7]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임신호적(壬申戸籍)에서는 "평민"(平民)으로 분류되었다.[9] 1886년, 박가는 도고라는 성을 가진 사족의 가록을 매입하여 그 호적에 들어갔고, 시게노리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가 되었다.[10] 그의 가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원정(1592~98년) 이후 규슈에 정착한 조선인의 후손이었다.
== 소년기 ==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12월 10일 "박 시게노리"(朴茂徳)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현(鹿児島県) 히요키군(日置郡) 미야다이가와무라(苗代川村)(현재 히요키시(日置市) 히가시이키마치 미야마(東市来町美山))에서 태어났다.[6] 미야다이가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문록·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 당시 포로가 되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귀국에 동행했던 조선인 도공 일부가 사쓰마번(薩摩藩)에 의해 모여 형성된 마을이었다.[7]
메이지 유신 이후 임신호적(壬申戸籍)에서는 "평민"(平민)으로 분류되었고, 1880년에는 미야다이가와 남성 364명의 연명으로 "사적 편입의 願"이 가고시마현청(鹿児島県庁)에 제출되었다.[9] 그러나 사족(士族)으로의 편입은 1885년 마지막 청원까지 계속 거절되었다.[6] 그 이듬해인 1886년, 박가는 도고라는 성을 가진 사족의 가록을 매입하여 그 호적에 들어갔고, 9월 6일 당시 만 4세가 되기 3개월 전이었던 시게노리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가 되었다.[10] 그의 아버지는 1886년 본래의 한국 성씨인 "보쿠" 또는 "박"을 대신하여 "도고"를 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889년 시모이슈인 촌립심상(下伊集院村立尋常) 소학교에 입학하였다.[77] 소학교에 다니며 별도로 사숙(私塾)에서 독서 지도를 받았는데, 공자의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77] 그의 외조카딸인 야마구치 도시는 후일 '대단한 공부벌레였다고, 옷자락이 닳도록 책상 앞에만 앉아 책을 넘기는 소년이었다고 어머니가 늘 말씀했어요.[77]'라 회고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급생으로 농부 아들인 사키모토 요시오가 있었다. 그는 자라서 의사가 되었다. 요시오의 아들인 유키오는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74]
사키모토 요시오가 아들 유키오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시게노리는 포켓용 영어사전을 늘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한 페이지를 전부 암기했다 싶으면 그 페이지를 찢어 삼키는 식이었다.[74]
== 청소년기 ==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12월 10일 "박 시게노리"(朴茂徳)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현(鹿児島県) 히요키군(日置郡) 미야다이가와무라(苗代川村)(현재 히요키시(日置市) 히가시이키마치 미야마(東市来町美山))에서 태어났다.[6] 미야다이가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문록·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 당시 포로가 되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함께 규슈에 정착한 조선인 도공들이 사쓰마번(薩摩藩)에 의해 모여 형성된 마을이었다.[7] 사쓰마번은 미야다이가와 주민들에게 조선 풍습을 유지하도록 하고, 일본식 이름 사용 금지와 다른 곳과의 통혼을 규제하는 한편, 다른 곳 사람들의 "난폭 행위"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리는 등, 보호와 통제를 병행했다.[8]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임신호적(壬申戸籍)에서는 "평민"(平민)으로 분류되었고, 1880년에는 미야다이가와 남성 364명의 연명으로 "사적 편입의 願"이 가고시마현청(鹿児島県庁)에 제출되었다.[9] 1886년, 박가는 도고라는 성을 가진 사족의 가록을 매입하여 그 호적에 들어갔고, 9월 6일 당시 만 4세가 되기 3개월 전이었던 시게노리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가 되었다.[10]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소학교 학생 시게노리가 천천히 빗속을 걷자 동네 어른들이 빨리 뛰라고 소리쳤지만, 시게노리는 '앞에도 오는 걸요.'라며 천연덕스럽게 걸었다고 한다.[78]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혈통이란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인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으며, 유일한 친구는 농부의 자제인 사키모토뿐이었다.[74]
가고시마현 보통중학교(현・가고시마현립 츠루마루고등학교(鹿児島県立鶴丸高等学校))를 졸업하고, 1901년 9월 구제 제7고등학교 조시관(第七高等学校造士館)(현・가고시마대학(鹿児島大学))에 진학했다.[12] 농상(農相)이었던 이시구로 타다아쓰(石黒忠篤)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그곳에 부임했던 가타야마 마사오(片山正雄)의 지도로 독일 문학(ドイツ文学)에 대한 이해를 깊게 되었다.[13] 1904년 9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독일문학과에 진학했고,[15] 1905년(明治38年) 5월, 대학 문예 잡지 『제국문학』(帝国文学) 임시 증간 제2호 "실러 기념호"(シルレル記念号)에 프리드리히 폰 쉴러(フリードリヒ・フォン・シラー) 작 『희곡마리아 스튜어트/Maria Stuart (Drama)de』를 소재로 한 문예 비평을 게재했다.[16]
== 대학 재학 시절 ==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독문과를 선택하였으나,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주임교수와 호흡이 맞지 않았는데, 주임은 독일 문헌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회화체를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도고 시게노리는 독일어 답변에 능숙하지 못했고, 훈고학(訓詁學)에 매달리는 주임의 방식은 그의 학습 스타일과 맞지 않아 수업 성적은 좋지 않았다.[75]
강의 내용도 이해되지 않아 수업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독문과는 졸업했으나 성적은 동급생 6명 가운데 꼴찌였다. 병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한데다, 다른 이들보다 1년 늦게 졸업하여 굴욕을 겪었다. 하숙집에 불이 나 책이 모두 불타버리는 사건을 겪고, 도쿄대 독문과 교수, 문예평론, 독일어 소설 쓰기의 꿈을 버리게 된다.[75]
1912년 '''外交官及領事官試験'''에 3회 도전 끝에 합격하였다. 아버지 도고 스이쇼(東郷寿勝)는 내무관료의 길은 아닐지라도 아들이 신분과 팔자를 바꾸는 큰일을 해낸것에 기뻐하며,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일주일간 연회를 베풀었다.[75] 잔치가 끝나고 관보에 합격자 발표가 나자 아버지 스이쇼는 본적지를 ‘가고시마시 니시센고쿠초(西千石町) 82번지의 2’로 옮겨 히오키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인연을 끊었다. 300년 가까이 지켜온 조선 혈통과 완전하게 결별한 것이다.[75]
도고는 가고시마현 히오키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이후 규슈에 정착한 조선인의 후손이었다. 1904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했다. 그는 다섯 번의 지원 끝에 1912년 일본 외무성에 입성했다.
== 외교관 생활 초기 ==
외무성에 임용되었으나 바로 신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 대기발령 조치되었다가 정무국과 통상국에서 7개월간 근무하였다. 당시는 공문서를 모두 붓으로 쓰던 시절이었다. 시게노리는 한문, 중국어, 영어, 라틴어, 독일어 등에 두루 능했으며 특히 고전을 배워 한문 실력이 대단하였다. 재직 초기 그는 '한자 구사나 필력에서 뛰어나고 문제를 파악해 대응하는 능력이 예리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고집이 세지 않고 과묵하였으므로 오히려 고위직 상사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해 늘 불러다 일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불평불만 하나 드러내지 않았다.
임관 동기생인 기타다 마사모토(北田正元)는 훗날 회고에서 '서구적인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양적인 인격수양, 유교적인 단련도 되어 있는, 거기에 문학적인 소양까지 갖춘 친구였다'고 한다. 1913년 중국의 선양(瀋陽) 총영사관 영사관보(補)로 발령되었다. 이어 스위스 3등 서기관을 거쳐 1919년 베를린 영사관으로 부임하였다.
도고의 첫 해외 부임지는 1913년 만주(滿洲)의 심양(Mukden)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었다. 1916년에는 스위스(Switzerland) 베른(Bern)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 배속되었다. 1919년에는 일본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을 비준함에 따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diplomatic relations)가 재개됨에 따라 도고는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Germany)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1921년 일본으로 돌아와 북미국 담당국에 배속되었다.
== 독일 근무 ==
1919년(다이쇼 8년)부터 1921년(다이쇼 10년)까지 베를린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카프 폭동이 발발하는 등 혼란기에 있었지만, 일독 관계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73] 이때 건축가 게오르그 데 랄란데의 과부였던 에디타 데 랄란데를 만나 귀국 후 1922년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아이가 다섯 있던 그녀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기본 설계한 건축기사다.[73] 유대계 독일인[20] 에디 드 라롱드(건축가 게오르크 드 라랑드의 미망인, 전 성 피취케 Pitsschke[21])를 만나 연인이 된다. 괴테의 로맨스 시집이 맺어준 인연이었다고 한다.[22] 독일에서 귀국 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22년 제국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무척 고민하였고 일본인의 차별 대우와 사귀던 여성들과 결혼하려 할 때 일본인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딛쳐 좌절됐다. 결국 일본인과 결혼하기 힘들어 불혹의 나이에 독일인 과부 에디타와 결혼,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딸이 성장하자 사위를 서양자(壻養子)로 삼아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라 하고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다.
1937년(쇼와 12년) - 1938년(쇼와 13년)에 주독 대사가 되었지만, 이때는 나치가 흥기하고 있었고 상황은 일변했다.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침략하고 있는 상태였고, 독일 국내적으로는 베를린의 시나고그가 나치에 의해 방화되는 등 유대인 박해가 현저해지고 있었다. 원래 독일 문학에 경도되어 독일 문화에 깊은 이해가 있던 동고는 나치에 대한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나치와 손을 잡고 싶어 했던 육군의 의향을 받고 있던 베를린 주재 육군 무관 오시마 히로시와, 일본과 손을 잡고 싶어 했던 나치의 외교 담당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대립하여 주독 대사직에서 해임되었다.
1919년에는 일본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을 비준함에 따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diplomatic relations)가 재개됨에 따라 도고는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Germany)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1932년 제네바(Geneva)에서 열린 성공적이지 못했던 세계 군축 회의(World Disarmament Conference)에서 일본 대표단장을 맡았다. 1937년 도고는 독일 대사로 임명되어 1년 동안 베를린에서 근무했다. 도고가 오시마 히로시(Hiroshi Ōshima)에게 독일 대사직을 물려주었다.
== 주 독일 대사 ==
1923년 구미국(歐美局) 제1과장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주독일주재 일본대사관으로 되돌아왔다. 1929년에는 독일주재대사관의 참사관으로 되돌아왔다. 1933년 일본 외무성 구미국장을 거쳐 유럽아프리카국장이 되었다가 1937년 독일 대사가 되어 다시 독일 대사관으로 갔다.
이후 1937년-1938년까지 대사로 부임하여 독일에서 다시 근무했다. 이때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하고 있었다. 도고는 나치를 싫어했고, 나치 독일과의 동맹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과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육군과 마찰을 빚어 독일 대사에서 경질되었다. 도고가 오시마 히로시(Hiroshi Ōshima)에게 독일 대사직을 물려준 후,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 모스크바(Moscow) 대사로 재배치되었다.
== 주 소련 대사 ==
1938년 도고는 소련 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방공 협정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 관계가 극히 나빴다. 몰로토프를 상대로, 소련-일본 어업협정을 맺고, 일본군과 소련군이 충돌한 노몬한 사건의 정전협상을 맺었다. 또한 소련-일본 불가침조약의 협상을 개시하였다. 여기서 소련의 중국국민당 지원을 중단하는 대신, 일본이 사할린의 권익을 포기하는 것을 협상 대상으로 삼아 거의 타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당시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들어서고 외상이 된 마쓰오카 요스케가 이를 반대하여 도고에게 귀환명령을 내렸다. 마쓰오카는 몰래 도고에게 자진 사퇴를 권했으나, 도고는 역으로 정식으로 징계 절차를 밟아달라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마쓰오카가 주도하여 소련-일본 불가침조약과 독-이-일 삼국동맹도 맺어졌다.
도고가 마쓰오카 요스케에 의해 주소련 대사를 경질당하고 외무성에서 쫓겨날 것 같다는 소문은 원로 니시토리 공망에게 까지 전해져 깊이 개탄했다고 전해진다.
== 외무 대신 ==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 외무대신으로 입각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점령지 철병을 기초로 한 협상안을 마련했으나, 군부와 미국의 강경한 태도로 무산되었다.[23]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도고와 해군 수뇌부는 공격 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전달하려 했으나, 주미 일본 대사관의 실수로 공격 이후에 전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기소되는 원인이 되었다.[25]
도고는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와 함께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와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 간의 직접 협상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의 외무대신이 된 후, 항복 선언에 서명했다. 1941년 12월 23일, 태국과의 동맹을 체결했다.
1942년 1월 21일, 일본 정부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발표했다.[2] 그러나 일본은 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42년 9월 1일, 대동아성(Ministry of Greater East Asia) 설치에 반대하며 외무대신직에서 사임했다.
1945년 4월,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郎)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복귀하여 포츠담 선언 수용을 지지했다. 소련의 협력을 기대하며 선언에 대한 공식 답변을 미뤘으나, 연합국은 이를 거부로 해석하고 폭격을 계속했다.
도고는 일본의 항복(surrender of Japan)을 주장한 내각 장관 중 한 명으로, 사토 나오타케(佐藤尚武) 대사에게 조건부 항복 의사를 소련에 전달하도록 지시했다.[3]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격과 8월 폭풍 작전(August Storm) 이후,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다.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에 의해 전쟁범죄(war-crime) 혐의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Sugamo Prison)에 수감되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에서 니시 하루히코(西春彦)가 변호했고, 1948년 11월 4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 종전 교섭 ==
1944년 사이판 함락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도고는 각국의 패전사를 연구하며 천황제를 유지하는 조건의 항복을 모색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중립국이었던 소련의 중재로 연합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1945년 오키나와 함락 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되자 그해 4월 9일 외상에 재취임했다. 이미 패전이 예정되어 취임을 거절했으나, 스즈키 간타로의 계속된 부탁과 전쟁 종결 처리는 도고만이 할 수 있다는 판단에 결국 취임했다.
그러나 그해 7월 말,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무시"한다고 밝혔다. 이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소련이 참전하여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도고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고, 군부는 강력히 반발했으나, 스즈키 간타로 수상과 쇼와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일본은 항복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포츠담 선언 수용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본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평화 조건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2]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으로부터 호의적인 조건을 기대하며, 소련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의향은 없지만 조건부 항복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3]
1945년(쇼와 20년) 4월, 도고는 종전 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스즈키 간타로 수상의 요청으로 입각한 도고는, 쇼와 천황의 뜻을 받들어 종전 교섭을 모색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의 패배가 필연적이었고,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전력을 더 투입하거나 소련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육군을 중심으로 본토 결전이 주장되며, 상황은 유예의 여지가 없었다.
도고는 총리대신, 외무대신, 육해군 대신 및 통수의 장(참모총장·군령부 총장)의 6인으로 구성된 회의를 제안했다.[28][29]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최고 전쟁 지도 회의가 있었지만, 군의 강경한 주장이 주로 논의되었기에, 도고는 최고위층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회의를 원했다. 다른 5인도 이에 동의하여, 최고 전쟁 지도 회의 구성원 회의가 열렸다.
1945년 5월 독일 패전 후, 일본은 소련을 통한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 중재를 모색했다. 첫 회의에서 육군 참모총장 우메쓰 요시지로는 소련의 참전 방지를 위한 대소 교섭 필요성을 제기했다. 도고는 소련을 중재로 한 평화 협상을 제안했으나, 육군 대신 아난 고레치카는 일본이 패배한 것이 아니므로 소련 참전 방지를 위한 교섭을 우선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결국,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의 중재로, 소련 참전 방지와 호의적 중립 획득을 우선하고, 평화 협상은 소련의 태도를 보며 진행하기로 결정했다.[30][31] 이 회의에서 소련 참전 방지 대가로 가라후토 반환, 어업권 양도, 남만주 중립화 등을 용인하기로 합의했다.[30][31]
도고는 소련 전문가인 히로타 고키 전 총리를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 대사에게 파견하여 소련의 의향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두 차례 회담에서 양측은 서로의 의견을 명확히 하지 않고 상대의 요구를 탐색하는 데 그쳤다.[32] 이후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졌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35][36]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동향을 살피던 사토 나오타케 소련 대사는 소련 중재 평화 협상에 반대했으나, 도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회의의 결정으로, 스웨덴, 스위스, 바티칸 등에서 진행되던 비밀 평화 협상은 모두 중단되었다.[37] 도고는 소련 외교의 교활함을 잘 알면서도, 결과적으로 소련에 기대는 외교를 펼쳤다. 이는 강경파 육군이 소련과의 협상(중립 유지를 위한 협상이라는 전제하에)에만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또한 쇼와 천황이 소련과의 협상에 호의적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도고 자신은 포츠담 선언 수락 후 추밀원 설명에서, 미국과 영국이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를 거부했기에 소련을 통해 종전을 이끌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37]
6월 22일, 천황 임석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참전 방지뿐 아니라 평화 협상을 소련에 요청한다는 국가 방침이 천황의 의사로 결정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를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7월 소련에 타진했으나, 소련은 포츠담 회담 준비로 바쁘다며 답변을 미뤘다.
포츠담 선언을 접한 도고는 "기본적으로 수락해야 하지만, 소련과의 관계 및 내용의 모호한 점을 밝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천황과 논의했다.[38] 쇼와 천황의 반응은 불분명하다. 도고의 메모에는 "협상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9] 반면, 도고의 부하였던 가세 도시카즈는 "원칙적으로 수락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확인 불가능하다.[40] 천황은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소련과의 교섭으로 밝히겠다는 도고의 의견에 동의하고, 기도 고이치와의 회담 후, 모스크바 협상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도고의 의견을 인정했다.[41]
그러나 아난 육상은 도고의 견해에 반대하며 포츠담 선언 전면 거부를 주장했다. 스즈키 수상과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은 "선언을 경시해도 큰 문제는 없으며, 소련과의 협상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안이한 인식으로, 포츠담 선언에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고, 잠시 상황을 지켜본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나 7월 28일, 일본 언론은 "웃기는 소리"(요미우리 신문), "묵살"(아사히 신문)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42] 같은 날, 스즈키 수상은 "공동 성명은 카이로 회담의 재탕으로 생각하며, 정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살한다. 전쟁 완수에 매진할 뿐이다"라고 발표했다.[43] 연합국은 이를 "reject(거부)"로 번역했다. 도고는 스즈키의 발언이 각의 결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8월 6일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8일 소련의 참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변화가 발생했다. 8월 9일 오전, 최고 전쟁 지도 회의가 개최되었다. 도고는 "황실의 안녕"만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고, 요나이 미쓰마사 해상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찬성했다. 그러나 아난 육상은 황실 안녕 외에, 무장 해제는 일본 측이, 점령은 최소화하고 도쿄 제외, 전범은 일본인 손으로 처벌한다는 4가지 조건을 주장했고, 우메쓰 요시지로 육군 참모총장과 도요다 소에무 해군 군령부 총장이 동의하여 평행선을 달렸다. 도고·요나이와 아난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본토 결전은 승산이 있다"는 아난·우메쓰에 대해 도고는 "상륙 부대 격파 후 전력이 다할 것이며, 적은 계속 상륙할 것이므로, 이길 보장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 중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심야에 천황 임석 궁중 회의가 열렸다. 스즈키 수상은 논의가 수습되지 않음을 천황에게 말하고, 결론을 천황의 성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천황은 외무대신 안에 동의
2. 1. 초기 이력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12월 10일 사쓰마번 나에시로가와촌(苗代川村)에서 조선계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났다.[6] 그는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부대에 연행되어 일본에 끌려온 도공 박평의의 후예로,[7]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임신호적(壬申戸籍)에서는 "평민"(平民)으로 분류되었다.[9] 1886년, 박가는 도고라는 성을 가진 사족의 가록을 매입하여 그 호적에 들어갔고, 시게노리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가 되었다.[10]가고시마현 보통중학교(현・가고시마현립 츠루마루고등학교(鹿児島県立鶴丸高等学校))를 졸업하고, 1901년 9월 구제 제7고등학교 조시관(第七高等学校造士館)(현・가고시마대학(鹿児島大学))에 진학했다.[12] 가타야마 마사오(片山正雄)의 지도를 받은 것을 계기로 독일 문학(ドイツ文学)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게 되었다.[13] 1904년 9월, 도고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독일문학과에 진학했고, 도고의 스승인 가타야마도 가쿠슈인대학(学習院大学) 교수로 부임했다.[15] 가타야마는 독일 문학자인 노보리하리 신이치로(登張信一郎)를 도고에게 소개했고, 세 사람은 "삼대회"(三代会)를 결성했다.[15]
1905년(明治38年) 5월, 대학 문예 잡지 『제국문학』(帝国文学) 임시 증간 제2호 "실러 기념호"(シルレル記念号)에 프리드리히 폰 쉴러(フリードリヒ・フォン・シラー) 작 『희곡마리아 스튜어트/Maria Stuart (Drama)de』를 소재로 한 문예 비평이 게재되었다.[16]
2. 2. 소년기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12월 10일 "박 시게노리"(朴茂徳)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현(鹿児島県) 히요키군(日置郡) 미야다이가와무라(苗代川村)(현재 히요키시(日置市) 히가시이키마치 미야마(東市来町美山))에서 태어났다.[6] 미야다이가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문록·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 당시 포로가 되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귀국에 동행했던 조선인 도공 일부가 사쓰마번(薩摩藩)에 의해 모여 형성된 마을이었다.[7] 시게노리의 가문은 조선 원정 이후 규슈에 정착한 조선인의 후손이었다.[73]메이지 유신 이후 임신호적(壬申戸籍)에서는 "평민"(平民)으로 분류되었고, 1880년에는 미야다이가와 남성 364명의 연명으로 "사적 편입의 願"이 가고시마현청(鹿児島県庁)에 제출되었다.[9] 그러나 사족(士族)으로의 편입은 1885년 마지막 청원까지 계속 거절되었다.[6] 그 이듬해인 1886년, 박가는 도고라는 성을 가진 사족의 가록을 매입하여 그 호적에 들어갔고, 9월 6일 당시 만 4세가 되기 3개월 전이었던 시게노리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가 되었다.[10]
1889년 시모이슈인 촌립심상(下伊集院村立尋常) 소학교에 입학하였다.[77] 소학교에 다니며 별도로 사숙(私塾)에서 독서 지도를 받았는데, 공자의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77] 그의 외조카딸인 야마구치 도시는 후일 '대단한 공부벌레였다고, 옷자락이 닳도록 책상 앞에만 앉아 책을 넘기는 소년이었다고 어머니가 늘 말씀했어요.[77]'라 회고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급생으로 농부 아들인 사키모토 요시오가 있었다. 그는 자라서 의사가 되었다. 요시오의 아들인 유키오는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74]
사키모토 요시오가 아들 유키오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시게노리는 포켓용 영어사전을 늘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한 페이지를 전부 암기했다 싶으면 그 페이지를 찢어 삼키는 식이었다.[74]
가고시마현 보통중학교(현・가고시마현립 츠루마루고등학교(鹿児島県立鶴丸高等学校))를 졸업하고, 1901년 9월 신설된 구제 제7고등학교 조시관(第七高等学校造士館)(현・가고시마대학(鹿児島大学))에 진학했다. 그곳에 부임했던 가타야마 마사오(片山正雄)의 지도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도고는 독일 문학(ドイツ文学)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게 되었다.[13]
2. 3. 청소년기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12월 10일 "박 시게노리"(朴茂徳)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현(鹿児島県) 히요키군(日置郡) 미야다이가와무라(苗代川村)(현재 히요키시(日置市) 히가시이키마치 미야마(東市来町美山))에서 태어났다.[6] 미야다이가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문록·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 당시 포로가 되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함께 규슈에 정착한 조선인 도공들이 사쓰마번(薩摩藩)에 의해 모여 형성된 마을이었다.[7] 사쓰마번은 미야다이가와 주민들에게 조선 풍습을 유지하도록 하고, 일본식 이름 사용 금지와 다른 곳과의 통혼을 규제하는 한편, 다른 곳 사람들의 "난폭 행위"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리는 등, 보호와 통제를 병행했다.[8]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임신호적(壬申戸籍)에서는 "평민"(平民)으로 분류되었고, 1880년에는 미야다이가와 남성 364명의 연명으로 "사적 편입의 願"이 가고시마현청(鹿児島県庁)에 제출되었다.[9] 1886년, 박가는 도고라는 성을 가진 사족의 가록을 매입하여 그 호적에 들어갔고, 9월 6일 당시 만 4세가 되기 3개월 전이었던 시게노리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가 되었다.[10]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소학교 학생 시게노리가 천천히 빗속을 걷자 동네 어른들이 빨리 뛰라고 소리쳤지만, 시게노리는 '앞에도 오는 걸요.'라며 천연덕스럽게 걸었다고 한다.[78]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혈통이란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인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으며, 유일한 친구는 농부의 자제인 사키모토뿐이었다.[74]
가고시마현 보통중학교(현・가고시마현립 츠루마루고등학교(鹿児島県立鶴丸高等学校))를 졸업하고, 1901년 9월 구제 제7고등학교 조시관(第七高等学校造士館)(현・가고시마대학(鹿児島大学))에 진학했다.[12] 농상(農相)이었던 이시구로 타다아쓰(石黒忠篤)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그곳에 부임했던 가타야마 마사오(片山正雄)의 지도로 독일 문학(ドイツ文学)에 대한 이해를 깊게 되었다.[13] 1904년 9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독일문학과에 진학했고,[15] 1905년(明治38年) 5월, 대학 문예 잡지 『제국문학』(帝国文学) 임시 증간 제2호 "실러 기념호"(シルレル記念号)에 프리드리히 폰 쉴러(フリードリヒ・フォン・シラー) 작 『희곡』를 소재로 한 문예 비평을 게재했다.[16]
2. 4. 대학 재학 시절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독문과를 선택하였으나,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주임교수와 호흡이 맞지 않았는데, 주임은 독일 문헌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회화체를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도고 시게노리는 독일어 답변에 능숙하지 못했고, 훈고학(訓詁學)에 매달리는 주임의 방식은 그의 학습 스타일과 맞지 않아 수업 성적은 좋지 않았다.[75]강의 내용도 이해되지 않아 수업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독문과는 졸업했으나 성적은 동급생 6명 가운데 꼴찌였다. 병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한데다, 다른 이들보다 1년 늦게 졸업하여 굴욕을 겪었다. 하숙집에 불이 나 책이 모두 불타버리는 사건을 겪고, 도쿄대 독문과 교수, 문예평론, 독일어 소설 쓰기의 꿈을 버리게 된다.[75]
1912년 '''外交官及領事官試験'''에 3회 도전 끝에 합격하였다. 아버지 도고 스이쇼(東郷寿勝)는 내무관료의 길은 아닐지라도 아들이 신분과 팔자를 바꾸는 큰일을 해낸것에 기뻐하며,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일주일간 연회를 베풀었다.[75] 잔치가 끝나고 관보에 합격자 발표가 나자 아버지 스이쇼는 본적지를 ‘가고시마시 니시센고쿠초(西千石町) 82번지의 2’로 옮겨 히오키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인연을 끊었다. 300년 가까이 지켜온 조선 혈통과 완전하게 결별한 것이다.[75]
도고는 가고시마현 히오키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이후 규슈에 정착한 조선인의 후손이었다. 1904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했다. 그는 다섯 번의 지원 끝에 1912년 일본 외무성에 입성했다.
2. 5. 외교관 생활
도고의 첫 해외 부임지는 1913년 만주(滿洲)의 심양(Mukden)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었다. 1916년에는 스위스(Switzerland) 베른(Bern)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 배속되었다. 1919년에는 일본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을 비준함에 따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diplomatic relations)가 재개됨에 따라 도고는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Germany)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1921년 일본으로 돌아와 북미국 담당국에 배속되었다.1926년에는 미국(United States) 일본 대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워싱턴 D.C.(Washington DC)로 이주했다. 그는 1929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만주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독일로 파견되었다. 그는 1932년 제네바(Geneva)에서 열린 성공적이지 못했던 세계 군축 회의(World Disarmament Conference)에서 일본 대표단장을 맡았다. 도고는 1933년 일본으로 돌아와 북미국 담당국 국장직을 맡았지만, 심각한 자동차 사고로 한 달 이상 입원해야 했다.
1937년 도고는 독일 대사로 임명되어 1년 동안 베를린에서 근무했다. 도고가 오시마 히로시(Hiroshi Ōshima)에게 독일 대사직을 물려준 후,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 모스크바(Moscow) 대사로 재배치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본과 소비에트 연방 간의 할힌골 전투(Battles of Khalkhin Gol) 이후 평화 협정을 협상했고, 1941년 4월 소일 중립 조약(Soviet–Japanese Neutrality Pact)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 그런 다음 당시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Yōsuke Matsuoka)에 의해 재배치를 위해 일본으로 소환되었다.
2. 5. 1. 외교관 생활 초기
외무성에 임용되었으나 바로 신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 대기발령 조치되었다가 정무국과 통상국에서 7개월간 근무하였다. 당시는 공문서를 모두 붓으로 쓰던 시절이었다. 시게노리는 한문, 중국어, 영어, 라틴어, 독일어 등에 두루 능했으며 특히 고전을 배워 한문 실력이 대단하였다. 재직 초기 그는 '한자 구사나 필력에서 뛰어나고 문제를 파악해 대응하는 능력이 예리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고집이 세지 않고 과묵하였으므로 오히려 고위직 상사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해 늘 불러다 일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불평불만 하나 드러내지 않았다.임관 동기생인 기타다 마사모토(北田正元)는 훗날 회고에서 '서구적인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양적인 인격수양, 유교적인 단련도 되어 있는, 거기에 문학적인 소양까지 갖춘 친구였다'고 한다. 1913년 중국의 선양(瀋陽) 총영사관 영사관보(補)로 발령되었다. 이어 스위스 3등 서기관을 거쳐 1919년 베를린 영사관으로 부임하였다.
도고의 첫 해외 부임지는 1913년 만주(滿洲)의 심양(Mukden)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었다. 1916년에는 스위스(Switzerland) 베른(Bern)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 배속되었다. 1919년에는 일본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을 비준함에 따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diplomatic relations)가 재개됨에 따라 도고는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Germany)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1921년 일본으로 돌아와 북미국 담당국에 배속되었다. 1926년에는 미국(United States) 일본 대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워싱턴 D.C.(Washington DC)로 이주했다. 그는 1929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만주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독일로 파견되었다. 그는 1932년 제네바(Geneva)에서 열린 성공적이지 못했던 세계 군축 회의(World Disarmament Conference)에서 일본 대표단장을 맡았다. 도고는 1933년 일본으로 돌아와 북미국 담당국 국장직을 맡았지만, 심각한 자동차 사고로 한 달 이상 입원해야 했다.
1937년 도고는 독일 대사로 임명되어 1년 동안 베를린에서 근무했다. 도고가 오시마 히로시(Hiroshi Ōshima)에게 독일 대사직을 물려준 후,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 모스크바(Moscow) 대사로 재배치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본과 소비에트 연방 간의 할힌골 전투(Battles of Khalkhin Gol) 이후 평화 협정을 협상했고, 1941년 4월 소일 중립 조약(Soviet–Japanese Neutrality Pact)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 그런 다음 당시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Yōsuke Matsuoka)에 의해 재배치를 위해 일본으로 소환되었다.
2. 5. 2. 독일 근무
1919년(다이쇼 8년)부터 1921년(다이쇼 10년)까지 베를린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카프 폭동이 발발하는 등 혼란기에 있었지만, 일독 관계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73] 이때 건축가 게오르그 데 랄란데의 과부였던 에디타 데 랄란데를 만나 귀국 후 1922년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아이가 다섯 있던 그녀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기본 설계한 건축기사다.[73] 유대계 독일인[20] 에디 드 라롱드(건축가 게오르크 드 라랑드의 미망인, 전 성 피취케 Pitsschke[21])를 만나 연인이 된다. 괴테의 로맨스 시집이 맺어준 인연이었다고 한다.[22] 독일에서 귀국 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22년 제국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그는 일찍부터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무척 고민하였고 일본인의 차별 대우와 사귀던 여성들과 결혼하려 할 때 일본인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딛쳐 좌절됐다. 결국 일본인과 결혼하기 힘들어 불혹의 나이에 독일인 과부 에디타와 결혼,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딸이 성장하자 사위를 서양자(壻養子)로 삼아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라 하고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다.
1937년(쇼와 12년) - 1938년(쇼와 13년)에 주독 대사가 되었지만, 이때는 나치가 흥기하고 있었고 상황은 일변했다.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침략하고 있는 상태였고, 독일 국내적으로는 베를린의 시나고그가 나치에 의해 방화되는 등 유대인 박해가 현저해지고 있었다. 원래 독일 문학에 경도되어 독일 문화에 깊은 이해가 있던 동고는 나치에 대한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나치와 손을 잡고 싶어 했던 육군의 의향을 받고 있던 베를린 주재 육군 무관 오시마 히로시와, 일본과 손을 잡고 싶어 했던 나치의 외교 담당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대립하여 주독 대사직에서 해임되었다.
1919년에는 일본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을 비준함에 따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diplomatic relations)가 재개됨에 따라 도고는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Germany)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1932년 제네바(Geneva)에서 열린 성공적이지 못했던 세계 군축 회의(World Disarmament Conference)에서 일본 대표단장을 맡았다. 1937년 도고는 독일 대사로 임명되어 1년 동안 베를린에서 근무했다. 도고가 오시마 히로시(Hiroshi Ōshima)에게 독일 대사직을 물려주었다.
2. 5. 3. 주 독일 대사
1923년 구미국(歐美局) 제1과장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주독일주재 일본대사관으로 되돌아왔다. 1929년에는 독일주재대사관의 참사관으로 되돌아왔다. 1933년 일본 외무성 구미국장을 거쳐 유럽아프리카국장이 되었다가 1937년 독일 대사가 되어 다시 독일 대사관으로 갔다.이후 1937년-1938년까지 대사로 부임하여 독일에서 다시 근무했다. 이때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하고 있었다. 도고는 나치를 싫어했고, 나치 독일과의 동맹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과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육군과 마찰을 빚어 독일 대사에서 경질되었다. 도고가 오시마 히로시(Hiroshi Ōshima)에게 독일 대사직을 물려준 후,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 모스크바(Moscow) 대사로 재배치되었다.
2. 5. 4. 주 소련 대사
1938년 도고는 소련 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방공 협정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 관계가 극히 나빴다. 몰로토프를 상대로, 소련-일본 어업협정을 맺고, 일본군과 소련군이 충돌한 노몬한 사건의 정전협상을 맺었다. 또한 소련-일본 불가침조약의 협상을 개시하였다. 여기서 소련의 중국국민당 지원을 중단하는 대신, 일본이 사할린의 권익을 포기하는 것을 협상 대상으로 삼아 거의 타결 직전까지 갔다.그러나 당시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들어서고 외상이 된 마쓰오카 요스케가 이를 반대하여 도고에게 귀환명령을 내렸다. 마쓰오카는 몰래 도고에게 자진 사퇴를 권했으나, 도고는 역으로 정식으로 징계 절차를 밟아달라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마쓰오카가 주도하여 소련-일본 불가침조약과 독-이-일 삼국동맹도 맺어졌다.
도고가 마쓰오카 요스케에 의해 주소련 대사를 경질당하고 외무성에서 쫓겨날 것 같다는 소문은 원로 니시토리 공망에게 까지 전해져 깊이 개탄했다고 전해진다.
2. 6. 생애 후반
## 외무 대신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 외무대신으로 입각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점령지 철병을 기초로 한 협상안을 마련했으나, 군부와 미국의 강경한 태도로 무산되었다.[23]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도고와 해군 수뇌부는 공격 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전달하려 했으나, 주미 일본 대사관의 실수로 공격 이후에 전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기소되는 원인이 되었다.[25]
도고는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와 함께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와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 간의 직접 협상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의 외무대신이 된 후, 항복 선언에 서명했다. 1941년 12월 23일, 태국과의 동맹을 체결했다.
1942년 1월 21일, 일본 정부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발표했다.[2] 그러나 일본은 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42년 9월 1일, 대동아성(Ministry of Greater East Asia) 설치에 반대하며 외무대신직에서 사임했다.
1945년 4월,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郎)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복귀하여 포츠담 선언 수용을 지지했다. 소련의 협력을 기대하며 선언에 대한 공식 답변을 미뤘으나, 연합국은 이를 거부로 해석하고 폭격을 계속했다.
도고는 일본의 항복(surrender of Japan)을 주장한 내각 장관 중 한 명으로, 사토 나오타케(佐藤尚武) 대사에게 조건부 항복 의사를 소련에 전달하도록 지시했다.[3]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격과 8월 폭풍 작전(August Storm) 이후,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다.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에 의해 전쟁범죄(war-crime) 혐의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Sugamo Prison)에 수감되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에서 니시 하루히코(西春彦)가 변호했고, 1948년 11월 4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 종전 교섭
1944년 사이판 함락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도고는 각국의 패전사를 연구하며 천황제를 유지하는 조건의 항복을 모색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중립국이었던 소련의 중재로 연합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1945년 오키나와 함락 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되자 그해 4월 9일 외상에 재취임했다. 이미 패전이 예정되어 취임을 거절했으나, 스즈키 간타로의 계속된 부탁과 전쟁 종결 처리는 도고만이 할 수 있다는 판단에 결국 취임했다.
그러나 그해 7월 말,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무시"한다고 밝혔다. 이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소련이 참전하여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도고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고, 군부는 강력히 반발했으나, 스즈키 간타로 수상과 쇼와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일본은 항복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포츠담 선언 수용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본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평화 조건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2]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으로부터 호의적인 조건을 기대하며, 소련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의향은 없지만 조건부 항복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3]
1945년(쇼와 20년) 4월, 도고는 종전 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스즈키 간타로 수상의 요청으로 입각한 도고는, 쇼와 천황의 뜻을 받들어 종전 교섭을 모색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의 패배가 필연적이었고,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전력을 더 투입하거나 소련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육군을 중심으로 본토 결전이 주장되며, 상황은 유예의 여지가 없었다.
도고는 총리대신, 외무대신, 육해군 대신 및 통수의 장(참모총장·군령부 총장)의 6인으로 구성된 회의를 제안했다.[28][29]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최고 전쟁 지도 회의가 있었지만, 군의 강경한 주장이 주로 논의되었기에, 도고는 최고위층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회의를 원했다. 다른 5인도 이에 동의하여, 최고 전쟁 지도 회의 구성원 회의가 열렸다.
1945년 5월 독일 패전 후, 일본은 소련을 통한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 중재를 모색했다. 첫 회의에서 육군 참모총장 우메쓰 요시지로는 소련의 참전 방지를 위한 대소 교섭 필요성을 제기했다. 도고는 소련을 중재로 한 평화 협상을 제안했으나, 육군 대신 아난 고레치카는 일본이 패배한 것이 아니므로 소련 참전 방지를 위한 교섭을 우선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결국,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의 중재로, 소련 참전 방지와 호의적 중립 획득을 우선하고, 평화 협상은 소련의 태도를 보며 진행하기로 결정했다.[30][31] 이 회의에서 소련 참전 방지 대가로 가라후토 반환, 어업권 양도, 남만주 중립화 등을 용인하기로 합의했다.[30][31]
도고는 소련 전문가인 히로타 고키 전 총리를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 대사에게 파견하여 소련의 의향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두 차례 회담에서 양측은 서로의 의견을 명확히 하지 않고 상대의 요구를 탐색하는 데 그쳤다.[32] 이후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졌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35][36]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동향을 살피던 사토 나오타케 소련 대사는 소련 중재 평화 협상에 반대했으나, 도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회의의 결정으로, 스웨덴, 스위스, 바티칸 등에서 진행되던 비밀 평화 협상은 모두 중단되었다.[37] 도고는 소련 외교의 교활함을 잘 알면서도, 결과적으로 소련에 기대는 외교를 펼쳤다. 이는 강경파 육군이 소련과의 협상(중립 유지를 위한 협상이라는 전제하에)에만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또한 쇼와 천황이 소련과의 협상에 호의적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도고 자신은 포츠담 선언 수락 후 추밀원 설명에서, 미국과 영국이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를 거부했기에 소련을 통해 종전을 이끌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37]
6월 22일, 천황 임석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참전 방지뿐 아니라 평화 협상을 소련에 요청한다는 국가 방침이 천황의 의사로 결정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를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7월 소련에 타진했으나, 소련은 포츠담 회담 준비로 바쁘다며 답변을 미뤘다.
포츠담 선언을 접한 도고는 "기본적으로 수락해야 하지만, 소련과의 관계 및 내용의 모호한 점을 밝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천황과 논의했다.[38] 쇼와 천황의 반응은 불분명하다. 도고의 메모에는 "협상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9] 반면, 도고의 부하였던 가세 도시카즈는 "원칙적으로 수락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확인 불가능하다.[40] 천황은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소련과의 교섭으로 밝히겠다는 도고의 의견에 동의하고, 기도 고이치와의 회담 후, 모스크바 협상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도고의 의견을 인정했다.[41]
그러나 아난 육상은 도고의 견해에 반대하며 포츠담 선언 전면 거부를 주장했다. 스즈키 수상과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은 "선언을 경시해도 큰 문제는 없으며, 소련과의 협상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안이한 인식으로, 포츠담 선언에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고, 잠시 상황을 지켜본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나 7월 28일, 일본 언론은 "웃기는 소리"(요미우리 신문), "묵살"(아사히 신문)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42] 같은 날, 스즈키 수상은 "공동 성명은 카이로 회담의 재탕으로 생각하며, 정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살한다. 전쟁 완수에 매진할 뿐이다"라고 발표했다.[43] 연합국은 이를 "reject(거부)"로 번역했다. 도고는 스즈키의 발언이 각의 결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 패전 직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으로 신형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30만명이 사망했다. 일본 군부에서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그는 사태를 지켜보자며 군부를 만류하였다. 8월 8일 소련이 연합국에 가담해 참전을 선언한다. 이미 전황은 기울었고 독일마저 항복해버린 터라 일본의 항복은 말 그대로 시간 문제였다. 소련이 참전을 선언했다는 정보를 접한 도고 시게노리는 8월 9일 최고전쟁지도회의 석상에서 '신속히 전쟁 종결을 단행해야 한다. 포츠담선언을 즉시 수락하자'며 군부 지도자들 앞에서 항복을 주장했다. 분노한 군부 지도자들은 즉각 반론을 펼쳤고 장내는 소란해졌는데, '철저 항전'을 외쳐온 강경파의 선두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가가 즉각 반론을 편다.
군부 인사들은 전부 강경론을 주장했지만 그는 홀로 항복을 주장했고 계속된 논쟁 끝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피해가 심각해짐으로서 일단 항복을 전제로 회의를 하기로 했다.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그렇다면 무조건 항복인지 조건을 달아 항복할 것인지를 정하자'고 묻자 도고는 천황을 지키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국체호지 하나만 남기고 다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기세등등한 연합국이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천황제 유지 하나만 주장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육군대신 아나미와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군사령총장 도요다 소에무가 “철저 항전”을 주장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회의 분위기는 강경파가 주도했다. 천황제 유지는 물론 ‘전장에 있는 일본군의 자주적 철수’ ‘전쟁 책임자를 일본이 처리하는 것’까지 연합국에 요구하자는 다(多)조건 항복론이 대세를 이룬다. 도고의 일(一)조건 항복론은 소수로 몰렸다. 이 논의는 8월9일 오후 임시 각료회의에 넘겨졌으나 결국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그 무렵 천황을 움직이던 측근 기도 고이치 궁내대신은 수상을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다조건 항복론에도 회의적인 점을 파악, 천황제 유지를 미국이 들어주겠냐는 것이었다. 이어 국제 정세에 밝고 수상과 외무대신을 경험한 시게미쓰 마모루가 중요한 조언을 해줬다. 그날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져 15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는 '이제는 미쳐 날뛰는 군부를 누를 수 있는 힘은 정부 내각에 없다. 천황 폐하가 직접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며 천황 히로히토에게 성단(聖斷)에 의한 항복을 주장했다. 그러자 그를 규탄하는 우익 인사들의 항의가 계속되었고 그가 매국노라는 성토 시위도 발생했다. 그날 저녁 11시 50분부터 천황 앞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천황의 항복이 아닌 어디까지나 스즈키 수상이 도고 외상의 '천황제 유지라는 조건부 항복'을 제안하고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결정되었다.
동고 시게노리(東郷茂德)는 미국과 다른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 강력히 반대했는데, 그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와 함께 총리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간의 직접적인 대면 협상을 마련하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事態의 급변을 받아 8월 9일 오전, 최고전쟁지도회의가 개최되었다. 동고(東郷)는 “황실의 안태(安泰)”만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나미(米内) 해상(海相)과 평沼기이치로(平沼騏一郎) 추밀원 의장이 이에 찬성했다. 그러나 아나미(阿南) 육상(陸相)은 황실의 안태 이외에, 무장 해제는 일본 측의 손으로 한다, 점령은 최소한으로 하고 도쿄를 점령 대상에서 제외한다, 전범은 일본인의 손으로 처벌한다는 4가지 조건을 주장했고, 이에 우메즈(梅津) 육군 참모총장과 토요다 부케(豊田副武) 해군 군령부 총장이 동의하여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특히 동고·미나미와 아나미 사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전황은 5부 5리이다”라는 아나미에 대해 “개개의 무용담은 별개로 하더라도 부겐빌, 사이판, 필리핀, 레이테, 이오지마, 오키나와, 우리 측은 완전히 패배하고 있다”라고 미나미는 반론했다. 또한 “본토 결전은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는 아나미·우메즈에 대해 “만약 상륙 부대의 제1파를 격파할 수 있었다고 해도, 우리 측은 거기서 전력이 다하는 것은 명백하다. 적측은 계속해서 제2파의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다. 그 이후까지 우리 측이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라고 동고는 주장했다.
이 회의 중에 나가사키에 제2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회의는 심야에 이르러 천황 림석(臨席)의 궁전 회의(御前会議)가 되었다. 스즈키(鈴木) 수상은 논의가 수습되지 않는다는 점을 천황에게 진언하고, 결론을 천황의 성단(聖斷)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천황은 외무대신의 안에 동의한다고 발언하고, 또 그 이유로 육해군의 본토 결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 이대로 싸움을 계속하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없어져 버리는 것 등을 말했다. 이렇게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 결정되었다. 그 수락안에서 동고는 “황실의 안태”라는 내용을(국체(國體) 보호를 강화의 절대 조건으로 하는 항전파에 대한 인상을 완화하기 위해)“천황의 국법상의 지위를 변경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하에”라고 했던 데 대해, 히라누마(平沼)의 이의를 받아 “천황의 국가 통치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것과 같은 요구는 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하에”라고 변경된 후, 천황이 수락을 결정했다.[44]
동고는 원폭 투하에 대해, 스위스 정부 등을 통해 항의하도록 주스위스 가세 슌이치 공사에게 지시를 촉구하고, “''대대적으로 프레스 캠페인을 계속하고, 미국의 비인도적 잔혹 행위를 폭로 공격하는 것, 긴급한 필요성이다… 무고한 30만의 시민을 모두 지옥에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치스」의 잔혹함보다 몇 배나 되는 것으로…''”라고 말했다. 또 선전 포고를 통고해 온 말리크(Malik) 소련 대사를 향해 직접, 중립 조약을 위반한 소련의 국제법 위반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고 있다.
일본의 항복에 관해서, 천황과 황실은 종전 후 일본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은, 연합국의 정부에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러나 “천황의 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라는 수락안은 미국 수뇌부 사이에 파문을 일으켰다.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White House)에서 연 회의에서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말살할 수 있는가, 조건부의 선언 수락을 고려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45] 출석자 중에서 포레스터 해군 장관과 스팀슨 육군 장관, 리히 해군 원수는 일본 측 답변의 수락을 주장했지만, 외교의 중심 인물인 번스 국무장관이 “왜 일본 측에 타협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반론하여, 트루먼이 이에 찬동했다.[45] 포레스터가 “(연합국 측이) 항복의 조건을 정의하는 형태로 일본의 수락을 받아들인다”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트루먼이 이를 받아들여 번스에게 답신의 작성을 명령했고,[45] 천황 황실에 관해서는 애매하게 이를 인정하는 답신이 일본 측에 8월 12일에 제시되게 되었다.
이 “번스 답변”에 따르면, 천황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권한에 종속한다 (subject to)”는 것, 그리고 “천황 제도 등 일본 정부의 형태는 일본 국민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교묘한 형태로 천황·황실의 유지를 인정하는 애매한 문장이었다. 아나미 육상, 우메즈 참모총장 등은 이 답변에 대해, 천황 황실에 관해서 애매하므로 연합국에 재차 질의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고, 다시 정부 수뇌부는 논의의 대립에 빠졌다. 동고와 미나미 해상은 재차 질의는 협상의 결렬을 의미한다고 반론했지만, 당초에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찬성했던 히라누마 추밀원 의장이 육군에 동의하는 등으로 사태는 혼란스러워졌고, 12일 심야, 실의와 피로에 찬 동고는 일단 사임을 표명하려고 했다. 동고의 사의에 놀란 스즈키 수상은 재차 궁전 회의에 의해 사태의 수습을 동고에게 약속하고, 사의를 번복시켰다.
그러나 14일, 쇼와(昭和) 천황이 “전과 같이, 나의 의견은 외무대신에 찬성이다”라는 두 번째의 “성단”으로 동고 지지를 눈물을 흘리며 표명함으로써, 육군의 강경파도 마침내 꺾이고, 포츠담 선언 수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나미는 종전의 절차에 서명한 후 론적(論敵)이었던 동고를 방문하여, “격론을 되풀이했지만, 육군 대신으로서의 직책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신세 졌습니다”라고 밝게 인사를 하고, 동고도 “무사히 끝나서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아나미에게 인사를 했다. 모든 의미에서 꼼꼼한 동고는 선언 수락에 임하여, 연합군 측에, 일본 육군의 무장 해제는 최대한 명예로운 형태로 해 주기를 엄중히 주의 통고했고, 아나미는 그 점을 동고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떠났다. 아나미는 스즈키 수상에게도 작별을 고한 후, 다음날 15일 새벽 “일사(一死)를 가지고 대죄(大罪)를 사죄하겠습니다. 신주(神州) 불멸을 확신하면서”라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 동고였지만, 아나미 자결의 소식에 “그래, 할복했구나. 아나미는 정말 좋은 사나이였지”라고 눈물을 흘렸다.
2. 6. 1. 외무 대신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 외무대신으로 입각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점령지 철병을 기초로 한 협상안을 마련했으나, 군부와 미국의 강경한 태도로 무산되었다.[23]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도고와 해군 수뇌부는 공격 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전달하려 했으나, 주미 일본 대사관의 실수로 공격 이후에 전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기소되는 원인이 되었다.[25]도고는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와 함께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와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 간의 직접 협상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의 외무대신이 된 후, 항복 선언에 서명했다. 1941년 12월 23일, 태국과의 동맹을 체결했다.
1942년 1월 21일, 일본 정부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발표했다.[2] 그러나 일본은 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42년 9월 1일, 대동아성(Ministry of Greater East Asia) 설치에 반대하며 외무대신직에서 사임했다.
1945년 4월,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郎)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복귀하여 포츠담 선언 수용을 지지했다. 소련의 협력을 기대하며 선언에 대한 공식 답변을 미뤘으나, 연합국은 이를 거부로 해석하고 폭격을 계속했다.
도고는 일본의 항복(surrender of Japan)을 주장한 내각 장관 중 한 명으로, 사토 나오타케(佐藤尚武) 대사에게 조건부 항복 의사를 소련에 전달하도록 지시했다.[3]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격과 8월 폭풍 작전(August Storm) 이후,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다.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에 의해 전쟁범죄(war-crime) 혐의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Sugamo Prison)에 수감되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에서 니시 하루히코(西春彦)가 변호했고, 1948년 11월 4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2. 6. 2. 종전 교섭
1944년 사이판 함락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도고는 각국의 패전사를 연구하며 천황제를 유지하는 조건의 항복을 모색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중립국이었던 소련의 중재로 연합국과 협상을 시도했다.1945년 오키나와 함락 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되자 그해 4월 9일 외상에 재취임했다. 이미 패전이 예정되어 취임을 거절했으나, 스즈키 간타로의 계속된 부탁과 전쟁 종결 처리는 도고만이 할 수 있다는 판단에 결국 취임했다.
그러나 그해 7월 말,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무시"한다고 밝혔다. 이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소련이 참전하여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도고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고, 군부는 강력히 반발했으나, 스즈키 간타로 수상과 쇼와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일본은 항복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포츠담 선언 수용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본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평화 조건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2]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으로부터 호의적인 조건을 기대하며, 소련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의향은 없지만 조건부 항복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3]
1945년(쇼와 20년) 4월, 도고는 종전 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스즈키 간타로 수상의 요청으로 입각한 도고는, 쇼와 천황의 뜻을 받들어 종전 교섭을 모색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의 패배가 필연적이었고,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전력을 더 투입하거나 소련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육군을 중심으로 본토 결전이 주장되며, 상황은 유예의 여지가 없었다.
도고는 총리대신, 외무대신, 육해군 대신 및 통수의 장(참모총장·군령부 총장)의 6인으로 구성된 회의를 제안했다.[28][29]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최고 전쟁 지도 회의가 있었지만, 군의 강경한 주장이 주로 논의되었기에, 도고는 최고위층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회의를 원했다. 다른 5인도 이에 동의하여, 최고 전쟁 지도 회의 구성원 회의가 열렸다.
1945년 5월 독일 패전 후, 일본은 소련을 통한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 중재를 모색했다. 첫 회의에서 육군 참모총장 우메쓰 요시지로는 소련의 참전 방지를 위한 대소 교섭 필요성을 제기했다. 도고는 소련을 중재로 한 평화 협상을 제안했으나, 육군 대신 아난 고레치카는 일본이 패배한 것이 아니므로 소련 참전 방지를 위한 교섭을 우선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결국,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의 중재로, 소련 참전 방지와 호의적 중립 획득을 우선하고, 평화 협상은 소련의 태도를 보며 진행하기로 결정했다.[30][31] 이 회의에서 소련 참전 방지 대가로 가라후토 반환, 어업권 양도, 남만주 중립화 등을 용인하기로 합의했다.[30][31]
도고는 소련 전문가인 히로타 고키 전 총리를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 대사에게 파견하여 소련의 의향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두 차례 회담에서 양측은 서로의 의견을 명확히 하지 않고 상대의 요구를 탐색하는 데 그쳤다.[32] 이후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졌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35][36]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동향을 살피던 사토 나오타케 소련 대사는 소련 중재 평화 협상에 반대했으나, 도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회의의 결정으로, 스웨덴, 스위스, 바티칸 등에서 진행되던 비밀 평화 협상은 모두 중단되었다.[37] 도고는 소련 외교의 교활함을 잘 알면서도, 결과적으로 소련에 기대는 외교를 펼쳤다. 이는 강경파 육군이 소련과의 협상(중립 유지를 위한 협상이라는 전제하에)에만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또한 쇼와 천황이 소련과의 협상에 호의적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도고 자신은 포츠담 선언 수락 후 추밀원 설명에서, 미국과 영국이 "무조건 항복이 아닌 평화"를 거부했기에 소련을 통해 종전을 이끌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37]
6월 22일, 천황 임석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참전 방지뿐 아니라 평화 협상을 소련에 요청한다는 국가 방침이 천황의 의사로 결정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를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7월 소련에 타진했으나, 소련은 포츠담 회담 준비로 바쁘다며 답변을 미뤘다.
포츠담 선언을 접한 도고는 "기본적으로 수락해야 하지만, 소련과의 관계 및 내용의 모호한 점을 밝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천황과 논의했다.[38] 쇼와 천황의 반응은 불분명하다. 도고의 메모에는 "협상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9] 반면, 도고의 부하였던 가세 도시카즈는 "원칙적으로 수락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확인 불가능하다.[40] 천황은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소련과의 교섭으로 밝히겠다는 도고의 의견에 동의하고, 기도 고이치와의 회담 후, 모스크바 협상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도고의 의견을 인정했다.[41]
그러나 아난 육상은 도고의 견해에 반대하며 포츠담 선언 전면 거부를 주장했다. 스즈키 수상과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은 "선언을 경시해도 큰 문제는 없으며, 소련과의 협상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안이한 인식으로, 포츠담 선언에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고, 잠시 상황을 지켜본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나 7월 28일, 일본 언론은 "웃기는 소리"(요미우리 신문), "묵살"(아사히 신문)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42] 같은 날, 스즈키 수상은 "공동 성명은 카이로 회담의 재탕으로 생각하며, 정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살한다. 전쟁 완수에 매진할 뿐이다"라고 발표했다.[43] 연합국은 이를 "reject(거부)"로 번역했다. 도고는 스즈키의 발언이 각의 결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8월 6일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8일 소련의 참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변화가 발생했다. 8월 9일 오전, 최고 전쟁 지도 회의가 개최되었다. 도고는 "황실의 안녕"만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고, 요나이 미쓰마사 해상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찬성했다. 그러나 아난 육상은 황실 안녕 외에, 무장 해제는 일본 측이, 점령은 최소화하고 도쿄 제외, 전범은 일본인 손으로 처벌한다는 4가지 조건을 주장했고, 우메쓰 요시지로 육군 참모총장과 도요다 소에무 해군 군령부 총장이 동의하여 평행선을 달렸다. 도고·요나이와 아난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본토 결전은 승산이 있다"는 아난·우메쓰에 대해 도고는 "상륙 부대 격파 후 전력이 다할 것이며, 적은 계속 상륙할 것이므로, 이길 보장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 중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심야에 천황 임석 궁중 회의가 열렸다. 스즈키 수상은 논의가 수습되지 않음을 천황에게 말하고, 결론을 천황의 성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천황은 외무대신 안에 동의하며, 육해군의 본토 결전 준비 부족, 전쟁 지속 시 일본 멸망 등을 이유로 들었다.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었다. 수락안에서 도고는 "황실의 안녕"이라는 내용을("천황의 국가 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변경) 천황이 수락을 결정했다.[44]
일본의 항복에 관해, 천황과 황실은 종전 후 일본의 혼란 수습에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이 연합국 정부에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천황의 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는 수락안은 미국 수뇌부 사이에 파문을 일으켰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말살할 수 있는가, 조건부 선언 수락을 고려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45] 제임스 포러스트 해군 장관, 헨리 스팀슨 육군 장관, 윌리엄 리히 해군 원수는 일본 측 답변 수락을 주장했지만, 제임스 F. 번스 국무장관이 반대했고, 트루먼이 이에 동조했다.[45] 포러스트의 타협안을 트루먼이 수용하여 번스에게 답신 작성을 명령했고,[45] 천황 황실에 관해서는 애매하게 이를 인정하는 답신이 8월 12일 일본 측에 제시되었다.
"번스 답변"에 따르면, 천황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권한에 종속한다(subject to)"는 것, "천황 제도 등 일본 정부 형태는 일본 국민 의사에 따라 결정"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교묘하게 천황·황실 유지를 인정하는 애매한 문장이었다. 아난 육상, 우메쓰 참모총장 등은 답변이 애매하므로 연합국에 재차 질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부 수뇌부는 다시 대립했다. 도고와 요나이 해상은 재차 질의는 협상 결렬을 의미한다고 반론했지만, 히라누마 추밀원 의장이 육군에 동의하는 등 혼란스러워졌고, 12일 심야, 도고는 사임을 표명하려 했다. 스즈키 수상은 재차 궁중 회의로 사태 수습을 약속하고, 도고의 사의를 번복시켰다.
14일, 쇼와 천황이 "외무대신에 찬성한다"는 두 번째 "성단"으로 도고 지지를 눈물로 표명함으로써, 육군 강경파도 꺾이고, 포츠담 선언 수락을 맞이했다. 아나미는 종전 절차에 서명 후 도고를 방문하여, "격론을 되풀이했지만, 육군 대신으로서의 직책 때문입니다. 신세 졌습니다"라고 인사했고, 도고도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라고 인사했다. 도고는 연합군 측에 일본 육군 무장 해제를 최대한 명예롭게 해 줄 것을 주의 통고했고, 아나미는 그 점을 감사하다고 말하고 떠났다. 아나미는 다음날 15일 새벽 할복했다. 도고는 아나미 자결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
2. 6. 3. 패전 직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으로 신형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30만명이 사망했다. 일본 군부에서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그는 사태를 지켜보자며 군부를 만류하였다. 8월 8일 소련이 연합국에 가담해 참전을 선언한다. 이미 전황은 기울었고 독일마저 항복해버린 터라 일본의 항복은 말 그대로 시간 문제였다. 소련이 참전을 선언했다는 정보를 접한 도고 시게노리는 8월 9일 최고전쟁지도회의 석상에서 '신속히 전쟁 종결을 단행해야 한다. 포츠담선언을 즉시 수락하자'며 군부 지도자들 앞에서 항복을 주장했다. 분노한 군부 지도자들은 즉각 반론을 펼쳤고 장내는 소란해졌는데, '철저 항전'을 외쳐온 강경파의 선두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가가 즉각 반론을 편다.군부 인사들은 전부 강경론을 주장했지만 그는 홀로 항복을 주장했고 계속된 논쟁 끝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피해가 심각해짐으로서 일단 항복을 전제로 회의를 하기로 했다.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그렇다면 무조건 항복인지 조건을 달아 항복할 것인지를 정하자'고 묻자 도고는 천황을 지키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국체호지 하나만 남기고 다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기세등등한 연합국이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천황제 유지 하나만 주장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육군대신 아나미와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군사령총장 도요다 소에무가 “철저 항전”을 주장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회의 분위기는 강경파가 주도했다. 천황제 유지는 물론 ‘전장에 있는 일본군의 자주적 철수’ ‘전쟁 책임자를 일본이 처리하는 것’까지 연합국에 요구하자는 다(多)조건 항복론이 대세를 이룬다. 도고의 일(一)조건 항복론은 소수로 몰렸다. 이 논의는 8월9일 오후 임시 각료회의에 넘겨졌으나 결국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그 무렵 천황을 움직이던 측근 기도 고이치 궁내대신은 수상을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다조건 항복론에도 회의적인 점을 파악, 천황제 유지를 미국이 들어주겠냐는 것이었다. 이어 국제 정세에 밝고 수상과 외무대신을 경험한 시게미쓰 마모루가 중요한 조언을 해줬다. 그날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져 15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는 '이제는 미쳐 날뛰는 군부를 누를 수 있는 힘은 정부 내각에 없다. 천황 폐하가 직접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며 천황 히로히토에게 성단(聖斷)에 의한 항복을 주장했다. 그러자 그를 규탄하는 우익 인사들의 항의가 계속되었고 그가 매국노라는 성토 시위도 발생했다. 그날 저녁 11시 50분부터 천황 앞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천황의 항복이 아닌 어디까지나 스즈키 수상이 도고 외상의 '천황제 유지라는 조건부 항복'을 제안하고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결정되었다.
동고 시게노리(東郷茂德)는 미국과 다른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 강력히 반대했는데, 그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와 함께 총리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간의 직접적인 대면 협상을 마련하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事態의 급변을 받아 8월 9일 오전, 최고전쟁지도회의가 개최되었다. 동고(東郷)는 “황실의 안태(安泰)”만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나미(米内) 해상(海相)과 평沼기이치로(平沼騏一郎) 추밀원 의장이 이에 찬성했다. 그러나 아나미(阿南) 육상(陸相)은 황실의 안태 이외에, 무장 해제는 일본 측의 손으로 한다, 점령은 최소한으로 하고 도쿄를 점령 대상에서 제외한다, 전범은 일본인의 손으로 처벌한다는 4가지 조건을 주장했고, 이에 우메즈(梅津) 육군 참모총장과 토요다 부케(豊田副武) 해군 군령부 총장이 동의하여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특히 동고·미나미와 아나미 사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전황은 5부 5리이다”라는 아나미에 대해 “개개의 무용담은 별개로 하더라도 부겐빌, 사이판, 필리핀, 레이테, 이오지마, 오키나와, 우리 측은 완전히 패배하고 있다”라고 미나미는 반론했다. 또한 “본토 결전은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는 아나미·우메즈에 대해 “만약 상륙 부대의 제1파를 격파할 수 있었다고 해도, 우리 측은 거기서 전력이 다하는 것은 명백하다. 적측은 계속해서 제2파의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다. 그 이후까지 우리 측이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라고 동고는 주장했다.
이 회의 중에 나가사키에 제2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회의는 심야에 이르러 천황 림석(臨席)의 궁전 회의(御前会議)가 되었다. 스즈키(鈴木) 수상은 논의가 수습되지 않는다는 점을 천황에게 진언하고, 결론을 천황의 성단(聖斷)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천황은 외무대신의 안에 동의한다고 발언하고, 또 그 이유로 육해군의 본토 결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 이대로 싸움을 계속하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없어져 버리는 것 등을 말했다. 이렇게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 결정되었다. 그 수락안에서 동고는 “황실의 안태”라는 내용을(국체(國體) 보호를 강화의 절대 조건으로 하는 항전파에 대한 인상을 완화하기 위해)“천황의 국법상의 지위를 변경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하에”라고 했던 데 대해, 히라누마(平沼)의 이의를 받아 “천황의 국가 통치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것과 같은 요구는 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하에”라고 변경된 후, 천황이 수락을 결정했다.[44]
동고는 원폭 투하에 대해, 스위스 정부 등을 통해 항의하도록 주스위스 가세 슌이치 공사에게 지시를 촉구하고, “''대대적으로 프레스 캠페인을 계속하고, 미국의 비인도적 잔혹 행위를 폭로 공격하는 것, 긴급한 필요성이다… 무고한 30만의 시민을 모두 지옥에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치스」의 잔혹함보다 몇 배나 되는 것으로…''”라고 말했다. 또 선전 포고를 통고해 온 말리크(Malik) 소련 대사를 향해 직접, 중립 조약을 위반한 소련의 국제법 위반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고 있다.
일본의 항복에 관해서, 천황과 황실은 종전 후 일본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은, 연합국의 정부에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러나 “천황의 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라는 수락안은 미국 수뇌부 사이에 파문을 일으켰다.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White House)에서 연 회의에서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말살할 수 있는가, 조건부의 선언 수락을 고려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45] 출석자 중에서 포레스터 해군 장관과 스팀슨 육군 장관, 리히 해군 원수는 일본 측 답변의 수락을 주장했지만, 외교의 중심 인물인 번스 국무장관이 “왜 일본 측에 타협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반론하여, 트루먼이 이에 찬동했다.[45] 포레스터가 “(연합국 측이) 항복의 조건을 정의하는 형태로 일본의 수락을 받아들인다”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트루먼이 이를 받아들여 번스에게 답신의 작성을 명령했고,[45] 천황 황실에 관해서는 애매하게 이를 인정하는 답신이 일본 측에 8월 12일에 제시되게 되었다.
이 “번스 답변”에 따르면, 천황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권한에 종속한다 (subject to)”는 것, 그리고 “천황 제도 등 일본 정부의 형태는 일본 국민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교묘한 형태로 천황·황실의 유지를 인정하는 애매한 문장이었다. 아나미 육상, 우메즈 참모총장 등은 이 답변에 대해, 천황 황실에 관해서 애매하므로 연합국에 재차 질의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고, 다시 정부 수뇌부는 논의의 대립에 빠졌다. 동고와 미나미 해상은 재차 질의는 협상의 결렬을 의미한다고 반론했지만, 당초에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찬성했던 히라누마 추밀원 의장이 육군에 동의하는 등으로 사태는 혼란스러워졌고, 12일 심야, 실의와 피로에 찬 동고는 일단 사임을 표명하려고 했다. 동고의 사의에 놀란 스즈키 수상은 재차 궁전 회의에 의해 사태의 수습을 동고에게 약속하고, 사의를 번복시켰다.
그러나 14일, 쇼와(昭和) 천황이 “전과 같이, 나의 의견은 외무대신에 찬성이다”라는 두 번째의 “성단”으로 동고 지지를 눈물을 흘리며 표명함으로써, 육군의 강경파도 마침내 꺾이고, 포츠담 선언 수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나미는 종전의 절차에 서명한 후 론적(論敵)이었던 동고를 방문하여, “격론을 되풀이했지만, 육군 대신으로서의 직책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신세 졌습니다”라고 밝게 인사를 하고, 동고도 “무사히 끝나서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아나미에게 인사를 했다. 모든 의미에서 꼼꼼한 동고는 선언 수락에 임하여, 연합군 측에, 일본 육군의 무장 해제는 최대한 명예로운 형태로 해 주기를 엄중히 주의 통고했고, 아나미는 그 점을 동고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떠났다. 아나미는 스즈키 수상에게도 작별을 고한 후, 다음날 15일 새벽 “일사(一死)를 가지고 대죄(大罪)를 사죄하겠습니다. 신주(神州) 불멸을 확신하면서”라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 동고였지만, 아나미 자결의 소식에 “그래, 할복했구나. 아나미는 정말 좋은 사나이였지”라고 눈물을 흘렸다.
2. 7. 패전과 전범 재판
도고 시게노리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에서 외상 유임을 요청받았으나, 전범으로 기소될 경우 새 내각에 폐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사양하고 가루이자와 별장에서 은둔하였다.[46] 1946년 5월 1일, 진주만 공격 전야에 연합국을 기만하기 위해 거짓 협상을 벌였다는 혐의로 스가모 구치소에 구속되어 집중 조사를 받았다.[48]1947년부터 열린 전범재판에서 도고는 "국장 시절부터 전쟁 모의에 참여하고, 외교 교섭을 통해 전쟁 개시를 돕는 기만 공작을 했으며, 개전 후에도 자리에서 전쟁 수행에 힘썼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52] 도고는 니시 하루히코와 조지 야마오카 등의 변호를 받았으며,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특히 시마다 시게타로 전 해군대신과의 증언 공방은 '오징어 먹물 논쟁'으로 불리며 화제가 되었다.[50]
도고는 재판을 "패전국에 대한 승전국의 재판"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52] 그는 "전쟁을 막지 못한 죄는 있지만, 도쿄 재판에서 들추어낸 죄는 아무것도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전쟁이 죄라면 영국의 인도 병합, 미국의 하와이 병합도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법적 틀에 따라 전쟁을 회피하는 메커니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일본국 헌법 제9조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도고는 옥중에서 《시대의 일면》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1948년 7월 23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병사하였다.
2. 8. 사후
도고 시게노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고, 무덤은 도쿄 시내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73] 1950년 7월 23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담낭염으로 사망한 그의 회고록 ''일본의 원인(The Cause of Japan)''은 사후에 출판되었으며, 전직 변호사였던 벤 브루스 블래커니/Ben Bruce Blakeney영어가 편집을 맡았다.3. 가족
도고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 1855년 - 1936년)은 박씨 성을 도고씨로 개성(改姓)하였다.[76] 독일 여성과 혼인 후, 딸 하나를 두어 데릴사위를 들여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로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다.
- 할아버지 : 박이구(朴伊駒)
- 아버지 : 박수승(朴壽勝)
- 어머니 : 박토메(1859년 - )
- * 누나 :
- ** 외조카딸 : 야마구치 도시
- 처 : 에디타 데 랄란데 (카를라 빅토리아 에디타 알베르티나 안나 드 라랑드, 옛 성씨 기제케, 1887-1967)
- * 딸 : 도고 이세
- * 사위 :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
- ** 손자: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76]
도고 시게노리는 1922년, 가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건축가 조지 드 라랑드(1872-1914)의 미망인인 에디타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도쿄의 임페리얼 호텔에서 열렸다. 에디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를 두었고, 도고 시게노리와의 사이에서 딸 이세를 낳았다.[69]
이세는 1943년 일본 외교관 혼죠 후미히코와 결혼했는데, 그는 아내 가족에 대한 존중으로 도고라는 성을 사용했다. 혼죠 후미히코(1915-1985)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주미 일본 대사를 역임했다.[4]
아내 에디타(Editha Giesecke, 혼인 후 "도고 에치"로 개명, 1887-1967)는 유대인 여성 Anna Giesecke와 독일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떠나고 출생 직후 어머니도 자살하여 어머니의 여동생 부부의 양녀가 되었다.[69] 러시아청국은행에서 근무하던 양부의 일본 지점 전근에 따라 15세에 일본에 왔으나, 양부가 급사하여 양모가 고베에서 민숙을 암영업하여 생계를 유지했다.[69] 17세 때, 일본 체류 중이던 게오르그 드 라 랑드에게 마음을 얻어 1905년에 결혼했다.[69] 9년 후 남편과 사별하고 귀국했다.[70][69]
외무차관・주 미국 일본 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는 사위이다.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 도고 시게히코와 전 네덜란드 대사・외무성 아시아유럽국장(후에 교토산업대학 교수) 도고 가즈히코(1945-)는 쌍둥이 손자이다.
4. 평가
하라구치 도라오 가고시마대 명예교수는 시게노리가 주변의 평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믿는 사람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차별받던 가고시마의 나에시로가와 출신이라는 점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74] 고등학교 동기인 기시모토 하지메는 시게노리가 인격적으로 뛰어난 존재였다고 회고했다.[74]
도고 시게노부는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소련을 중개로 한 평화 교섭은 어리석은 계책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도고는 소련이 얄타 회담에서 대일 참전 밀약을 맺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고다 히로키 전 총리의 말릭 주일 소련 대사와의 협상에 기대를 걸었지만, 회담은 6월 3일부터 7월 14일까지 별다른 성과 없이 중단되었다.[53] 사토 나오타케는 이로 인해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고 비판했다.[53]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대해 도고는 소련의 답변을 기다리며 대응을 미루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연합국에게 묵살당한 것으로 간주되어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54] 그러나 윌리엄 D. 리히는 트루먼이 소련을 매개로 한 평화 협상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도고는 고이소 내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가 추진한 스웨덴을 통한 평화 교섭을 중단시키고, 가상 적국인 소련을 중개자로 선택하여 포츠담 선언 이후에도 소련에 의존했다. 그러나 얄타 회담 밀약으로 인해 소련은 평화 중개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로 평화 교섭은 무산되었다.
도고는 회상록에서 자신의 제안이 연합국에 전달되어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지만,[55] 실제로는 미국이 외교 전보 해독을 통해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56]
소련을 통한 강화 조건 개선 기대는 도고 개인뿐 아니라 정부 "평화파"에게도 공통된 인식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세가와 타케시는 모스크바 중재가 일본 정치가들에게 현실 도피 수단이었으며,[57] 천황제 유지를 위한 욕심이 그들을 유혹했다고 지적했다.[58]
5. 저서
도고 시게노리는 《시대의 일면》(時代の一面)(미완)을 저술하였다. 동고 시게노부(東郷茂徳)의 『시대의 한 단면: 대전 외교의 수기』(개조사(改造社), 1952년)는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원서방(原書房)에서는 초판 1967년, 신장판 1978년, 1989년, 보급판 2005년에 출간되었고(ISBN 456-2020199), 중공문고(中公文庫)에서는 1989년 7월, 개정판 2021년 7월에 출간되었다.(해설 동고 시게히코(東郷茂彦))(ISBN 412-2070902) 영역판은 ''The Cause of Japan''(ISBN 0-837194-32-6)이며, 독역판은 ''Japan im Zweiten Weltkrieg'', 러역판은 ''Воспоминания японского дипломата''(Новина, 1996, 보리스 슬라빈스키(ボリス・スラヴィンスキー) 역, ISBN 589036054X, OCLC No 1020887271)이다.
6. 기타
도고 시게노리의 어머니 박토메는 남편이 물으면 “그때는 이랬고 저랬다”고 확실하게 대답해주었으며, 돈 거래에 관해서도 아주 작은 액수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처리하여 박수승 도자기방의 회계 겸 기록 담당이었다. 박토메는 시집올 때까지만 해도 읽고 쓸 줄 몰랐지만 타고난 지력(知力)과 노력으로 글을 배우고 깨쳤다.[77] 도고 시게노리보다 3년 전에 태어난 누나는 조선 혈통과 전통을 이어가는 고루한 박씨 집안의 첫아이가 사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증조모가 무척 서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78]
도고 시게노리가 태어나기 직전인 1880년, 촌민 남자 364명이 연명해 가고시마 현청에 사적(士籍)에 편입시키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이 탄원에 서명한 이들의 명단에 수승의 아버지 박이구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끝내 무시되었다.[77]
도고 시게노리는 겉으로는 도공 박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숨겼지만 가보지 못한 조선을 그리워했다고 한다.[73] 국장 시절 조선에서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 일본 외무성 과장으로 부임했던 경주시 출신 직원에게 자신도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토로하며 격려하기도 했다.[73]
도고 시게노리의 사위이자 양자인 도고 후미히코 역시 외교관으로, 김대중 납치 사건과 문세광 사건 당시 한국 내의 반일 감정과 일본 내의 반한 감정 확산을 막고 사태 조절에 힘썼다.[73]
도고 시게노리의 고향인 나에시로가와의 도공 심수관 14대인 심혜길(沈惠吉)은 아버지의 부탁으로 와세다 대학 재학 중 아홉 차례나 시게노리를 면회하러 다녔다고 한다. 심혜길의 회고에 의하면 시게노리는 고향의 과자조각을 싸들고 가면 반갑게 맞아줬다고 한다.[76][79]
도고 시게노리가 받은 계급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계급 |
---|---|
1913년 1월 30일 | 종칠위[59] |
1917년 1월 31일 | 정칠위[59] |
1919년 8월 11일 | 종육위[59] |
1922년 1월 20일 | 정육위[59] |
1924년 2월 15일 | 종오위[59] |
1929년 7월 15일 | 정오위[59] |
1934년 7월 16일 | 종사위[59] |
1937년 11월 15일 | 정사위[59] |
1940년 12월 2일 | 종삼위[59][60] |
1942년 9월 29일 | 정삼위[59] |
도고 시게노리가 받은 훈장은 다음과 같다.
외국 훈장 수여 허가는 다음과 같다.
연도 | 훈장 |
---|---|
1938년 4월 6일 | 40px 독일(나치 독일):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65] |
1939년 2월 20일 | 이탈리아 왕국: 왕관 훈장 그랑 크로아[66] |
1942년 2월 9일 | 40px 태국: 백상 훈장 1등 훈장[67] |
1943년 4월 6일 | 이탈리아 왕국: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훈장 대십자 기사 대수장[68] |
도고 시게노리를 연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 미야구치 세이지(도호(東宝) 「일본에서 가장 긴 날」, 「격동의 쇼와사 군벌」)
- 노노무라 키요시(20세기폭스(20世紀フォックス) 「트라 트라 트라!」)
- 하라다 키요토(도에이(東映) 「대일본제국」)
- 츠루타 고지(NHK(日本放送協会) 대하드라마(大河ドラマ) 「산하연유」)
- 스기우라 나오키(TBS(TBSテレビ) 「그리고 전쟁은 끝났다」)
- 가토 고(TBS 「목숨이었으니 비극의 외상 도고 시게노부」)
- 나카야마 진(텔레비도쿄(テレビ東京) 「성단(聖断)」, 2005년)
- 쿠사나기 코지로(러시아(ロシア)·이탈리아(イタリア)·프랑스(フランス)·스위스(スイス) 합작영화 「태양」)
- 하시즈메 이사오(TBS(TBSテレビ)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 개전과 도조 히데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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